글이 다소 길어져서,
낭망백수님의 덧글에 대한 답변을 여기에 대신합니다.
저도 낭망백수님이 무엇을 답답해 하시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습니다. 신앙적인 문제로 결국 귀결이 되기에,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무 아래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신명기의 구절 때문이었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메시야일 수 없으니까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불경스럽고 저주스러운 일이라고 여긴 것. 그렇기에 예수를 따르는 갈릴리인들과 하나님이 함께할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
이것도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고자 했던 순수한 신앙의 표출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순수성 안에는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한 정치적 이념이 포함된 것일 수밖에 없겠지만요. 하지만, 자신들의 믿음에 충실하고 순수한 것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들이 멸시했던 팔레스타인 민중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살이 비극적인 사건이듯, 십자가는 매우 수치스럽고 불경하고 저주스러운 사건입니다. 자살이 죄라고 흔히 말해지듯, 십자가도 하나님의 저주라고 믿어지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죽음을 통해 신적
계시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복음서의 서사 구조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거룩을 내세우는 종교를 앞세우던 사람들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이 저주하는 방식의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우리는 이 아이러니를 통해 유대인들의 정치-종교적 공동체의, 신앙과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억압과 폭력과 부조리를 발견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유대인들의 "성결 코드"가 주는 배타적 정체성에 기반한 신앙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제,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나중에 잘 정리했듯이, 십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무의미해졌습니다.
노무현의 자살이 갖는 상징성도 일면 유사합니다. 지금 이 파장이 커지고 있는 이유는 그 자살이 미화해야할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자살은 결코 있어서는 않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의 자살을 통해, 그 비참한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과 불의가 극명하게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인들 속에 잠재해 있던 정의를 향한 갈망이 끓어 오르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들의 정의를 향한 소망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실까요? 저는 함께 하신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제가 보는 한동대 성명서의 본질입니다. 저는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모순을 그들이 지금 겪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한동대 학생들이 '자살'이라는 거치는 돌에 걸려서 넘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노무현을 예수와 동등으로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낭망백수님께서는 노무현을 지지하신다고 하셨고 저도 그를 훌륭한 정치인으로 기억하고 있고 인간적으로 매우 좋아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FTA에 그토록이나 집착한 그를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잘 이해하시겠지만, 노무현의 자살이 십자가의 사건에 비길만한,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거나 하는 그런 어떤 거창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의 현상이 예수 당시의 상황과 비유적으로 유사하다는 뜻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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